삼현파(三贤派)의 유래

김해 김씨 삼현파(三贤派)

이조 이십이대 정종대왕(서기 1777)께서 김해김씨(金海金氏)를 가리켜 삼한갑족(三漢甲族)이라 하시며 절효(극일), 탁영(일손), 삼족당(대유) 세현인을 가리켜 청도 三賢이라 하였으며, 한 집안에서 四代間에 三賢人이 났다는 일은 古來로 드문 일인고로 이로 인해 삼현파(三賢派)로 정하였다 한다.

[ 계파 ]

 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142개파가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종파인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.

   –경파(京派영견, 영서, 영정, 영순) : 고려의 김목경(牧卿)을 중시조로 한다.

   –사군파(四君派극조, , 여수, 세기) : 목경의 동생 김익경(益卿)이 중시조다.

   –삼현파(三賢派극일, 일손, 대유) : 김관()중시조로 한다.

  

삼현파(三賢派 : 판도판서공파)의 일세조(一世祖)인 관()은 고려에서 판도판서(版圖判書)를 역임하고 학교(學校)를 건설하여 유학(儒學)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()을 세웠으며, 그의 현손(玄孫) 극일(克一)은 효행(孝行)으로 이름을 떨쳤다.

극일(克一)의 아들 맹()은 세종(世宗) 때 문과(文科)에 올라 집의(執義)를 지냈으며, 밤에 용마(龍馬)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(駿孫)·기손(驥孫)·일손(馹孫)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(金氏三珠)로 일컬어졌다.

1486(중종 17) 식년문과(式年文科)에 급제한 일손(馹孫)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(巨儒) 김종직(金宗直)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(金宏弼)·정여창(鄭汝昌)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(春秋館)의 사관(史官)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(全羅監司) 이극돈(李克墩)의 비행을 사초(史草)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.

연산군(燕山君)이 등극하여 [성종실록(成宗實錄)]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(李克墩)이 당상관(堂上官)으로 참여하여 사초(史草)를 살피게 되니 일손(馹孫)의 스승인 김종직 (金宗直)이 쓴 조의제문(弔意帝文 :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)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, 이극돈이 노사신(盧思愼)·윤필상(尹弼商)·한치형(韓 致亨)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(馹孫)은 권오복(權五福)·권경유(權景裕)· 이 목(李 穆) 등과 함께 참수(斬首) 당하였고, 김종직(金宗直)은 부관참시(剖棺斬屍 : 죽은 뒤 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)되었다.

일손(馹孫)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, 중종조(中宗朝) 영의정(領 議政) 남 곤(南 袞)은 말하기를세상에 다시 탁영(濯纓 : 김일손의 호)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 까. 그의 문장(文章)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(江河)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 고 일손(馹孫)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.

 

삼현(三賢)의 한 사람인 대유(大有)는 일손(馹孫)의 조카이며 준손(駿孫)의 아들이다. 무오사화(戊午士禍)에 숙부(叔父) 일손(馹孫)이 참수당하자 부자(父子)가 함 께 호남(湖南)에 유배되었다가 중종(中宗)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(志節)로 살았으며, 3개월 간의 칠원현감(漆原縣監)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(淸道)의 운문산(雲門山) 속 삼족당(三 足 堂)에서 73세로 일생(一生)을 마쳤다.

일손(馹孫)의 증손(曾孫) 언유(彦諭)는 고양(高陽)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(孝行)으로 명망이 높았고, ()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(松雪體)에 능하여 공사(公私)의 비()와 병풍·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.

언유(彦諭)의 아들 현성(玄成)은 광해군(光海君) 때 폐모론(廢母論)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, 시·서·화에 모두 능했다.